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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단양투데이 최경옥 기자, [기획1.2]되돌아보는 동족상잔의 아픔-2023년7월27일 6·25전쟁 정전협정70주년-6·25전쟁 제천지역 휩쓸고지나가/주민2,000여명 사망·행방불명

장애란 2023. 9. 27. 03:07

*출처 < #제천단양투데이 #최경옥 기자, [기획1]되돌아보는 동족상잔의 아픔-2023년7월27일 #6·25전쟁 #정전협정70주년-6·25전쟁 제천지역 휩쓸고지나가/주민2,000여명 #사망· #행방불명> 7월 27일

 

지난 1953년 7월 27일 경기도 파주 판문점에서 체결된 협정으로 동족상잔의 전쟁이 중단됐고 2022년 현재까지 ‘정전(停戰)’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은 지난 1950년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됐다. 이에 2년 앞서 1948년 건국된 신생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미국을 비롯한 16개국이 UN군의 기치로 북한군가 맞섰다. 북한을 도와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도 참전을 했다. 소련은 공군 조종사를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자 패전국 일본은 소해정(掃海艇·기뢰 제거 선박)을 파견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대만으로 천도한 중화민국(中華民國) 정부도 지원군을 파병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은 선제타격작전 계획에 따라 38도선 전 전선에 걸쳐 남침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서해상 옹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동두천~포천~춘천~주문진 등을 잇는 38도선 전역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북한군은 동부전선인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 등에 해병대와 유격대를 상륙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을 상대로 활약했던 소련제 탱크 T-34를 앞세운 북한군은 전쟁 발발 당일 개성(파주-문산 축선)과 동두천·포천(동두천-의정부 축선) 등을 점령했다. 서부전선에서는 파주와 문산을 거쳐 서울로, 중부전선에서는 동두천과 의정부를 거쳐 서울로 진격했다. 결국 6월28일 새벽. 한국군은 미아리 방어선까지 격파 당했다. 수도 서울도 함락을 당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대구 등을 거쳐 부산으로 천도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북한군에 한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는 마침내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대구에서 마산까지 서남부 방어는 유엔군이, 대구에서 포항까지는 한국군이 방어를 맡았다.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에서 9월 중순까지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과 혈전을 계속하였다.

 

전세가 역전된 것은 9월이다.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다. 상륙작전 후 전세가 완전히 역전됐다. 9월28일 서울을 수복했다. 10월19일 백선엽 사단장이 지휘하는 국군 1사단은 평양에 입성했다. 이후 국군 중 선두 부대는 압록강에 도달했다. 유엔군도 한반도에서 공산군을 몰아내기 위한 마지막 공세에 몰입했다.

 

북한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소련과 중국은 참전을 결정했다. 마오쩌둥은 ‘순망치한(脣亡齒寒)’, 즉 북한이 망하면 중국이 위태로워진다는 논리를 내세워 당초의 약속대로 군대를 보냈다. 1950년 10월19일 펑더화이의 지휘 아래 1차로 30만여명의 병력이 압록강 3개 지점을 거쳐 입북했다. 소련군도 1950년 11월부터 공군을 파병했다.

 

일명 ‘크리스마스공세’였던 11월24일 최종 공세에서도 큰 손실을 입은 유엔군은 남쪽으로 후퇴했다. 당시 맥아더는 참전한 중국 인민지원군의 숫자가 약 8만명에서 12만명 사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60만명이 넘었다. 결과적으로 크리스마스 대공세, 즉 1950년 12월25일까지 중국 국경선까지 진출하여 전쟁을 종결하려 했던 맥아더의 구상은 대규모의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좌절됐다.

 

결과적으로 1951년 1·4 후퇴로 서울을 다시 중공군에 내주었다. 중공군은 경기도 평택까지 남하했으나 유엔군의 반격을 받고 격퇴당했다. 유엔군은 1951년 3월15일 서울을 재수복했고 여세를 몰아 3월 말 38선을 회복하였다. 이후 전선은 교착되었으며, 휴전이 모색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막후 접촉에서 휴전에 동의했다. 1953년 3월 휴전회담이 다시 열렸다. 이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 반대가 본격화됐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기회가 무산된다고 하여 휴전에 반대했다. 그는 정전회담에서 한국군 대표를 철수시켰다. 정전협정이 체결되면 국군의 작전권을 회수해서 단독으로 국군을 북진(北進)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이승만은 안전보장 없는 휴전협정에 반대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이로써 3년 1개월 2일, 1129일 동안 계속됐던 6·25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가게 됐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제천단양투데이 최경옥 기자, [기획2]되돌아보는 동족상잔의 아픔-2023년7월27일 6·25전쟁 정전협정70주년-6·25전쟁 제천지역 휩쓸고지나가/주민2,000여명 사망·행방불명>

 

◇6·25전쟁의 포화 속 제천 수많은 희생 치러

지구상에서 가장 잔혹한 동족상잔(同族相殘)으로 기록된 이 전쟁은 35년의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겨우 얻어낸 광복이 지난 5년 뒤의 일이다. 2차 세계대전 보다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던 6·25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있어 잊어지지 않은 아픔이자 상처이다. 그토록 많은 동족이 화약연기 속에 스러져 갔으나 여전히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겨진 남과 북은 오늘도 총부리를 겨눈 채 속절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6·25전쟁 당시 포화는 제천지역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6·25전쟁에서 제천지역은 전황에 따라 몇 차례나 공산군과 국군 및 미군에 의해 점령되면서 많은 희생과 갈등을 겪었다.

 

6·25전쟁 초기 강원도와 충청북도 북부지역인 제천과 단양지역 등의 방어는 국군 제6사단과 제8사단이 맡았다.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등 험준한 산세와 남한강이라는 자연적 방어선을 갖추고 있는 이 지역은 북한군 방어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월등히 우세한 전투력을 갖춘 북한군은 전쟁 발발 이틀만인 6월27일 춘천을 함락시켰다. 이후 남진을 계속한 북한군은 7월2일 양평·원주·횡성 일원을 점령했다. 이 루트는 삼국시대 신라가 통일전쟁을 벌였던 그 곳이다. 제천과 단양을 점령, 남한강 상류를 접수한 신라군은 고구려 정벌을 위해 원주를 거쳐 춘천방면을 치달았다. 북한군은 역으로 춘천·원주를 거쳐 제천을 점령, 한강 상류의 교두보를 확충한다는 전략이었다.

 

당시 제천지역의 방어는 원주~제천 간 중앙선 축선의 북한군 저지 임무를 띤 국군 2사단이 담당하다가 음성으로 이동하라는 작전 명령으로 8사단에 인계되었다. 8사단은 강릉 지역 방어를 책임졌던 부대이다. 제천으로 이동하라는 작전 명령에 따라 8사단은 7월2일에 제천지역에 도착했다.

 

원주지역의 수비에 나선 8사단은 북한군과의 공방전 끝에 7월4일에 가리파재(치악재)를 돌파당하고 제천으로 분산 철수한다. 7월5일에는 충주로 이동하라는 잘못된 명령전달로 열차를 이용, 이동하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다. 충주로의 이동명령이 뒤늦게 잘못된 것임을 알고 북상을 시도했으나 8사단이 떠났던 제천지역은 이미 북한군에 점령된 뒤였다.

 

이런 일들은 개전 후 불과 며칠 만에 진행됐다. 정부는 대책 없이 남하했다. 제천지역 주민들은 영문을 모른 채 우왕좌왕했다. 인민군이 군인이나 경찰·공무원 가족을 해친다는 풍문이 있어 관련 당사자들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제천읍 내에서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보도연맹에 가입했던 민간인들 중 37~38명이 군경에 의해 피살됐다.

 

인민군이 지나가고 난 뒤에는 ‘공산당 조직’이 들어왔다. 잠적했던 좌익적 성향을 가진 이들은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머슴살이를 했던 이들이 공산당에 의해 전면에 내세워지면서 인민위원회·여성동맹·청년동맹 등이 조직됐다. 공산당은 이런 조직들을 이용, 우익 인사를 탄압하고 북쪽의 체제를 선전하며 토지 개혁 등을 주장했다. 당시 봉양면 면장이 희생됐다. 새로운 권력의 눈치를 보던 주민들은 의용군이나 노무자로 징발당하기도 했다.

 

◇ 1천624명 제천시민 사망 517명 행방불명

9월15일 유엔(UN) 연합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하면서 전황은 뒤바뀌었다. 국군 2군단의 중동부 전선 탈환 작전으로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했던 8사단은 의성~안동~영주를 지나 9월29일 단양지역을 수복했다. 다음날인 30일에는 제천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제천 주민들은 비로소 3개월간의 공산군 치하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군에 협조했다는 명분하에 즉결 처분당하는 일로 인해 공포의 일상은 여전했다.

 

얼마 후인 10월 중국군이 개입하게 되면서 전황은 또 다시 뒤바뀐다. 1951년 1월 초 서울을 또 빼앗은 중국군은 계속 남진, 제천지역까지 밀고 들어왔다. 또 다시 공산치하로 처한 제천지역은 인민군 잔류 병력의 활동이 다시 활발해졌다. 1951년 1월 중순 북한군 2군단이 원주~제천~단양의 동쪽 산악 지대를 따라 남하, 영월까지 진격했다. 1월말까지 제천과 영월지역에서 국군과 공산군의 공방전은 지속됐다.

 

1월말을 전후로 북한군은 제천지역에서 축출됐다. 2월11일 중국군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국군과 미군은 원주~제천에서 저지선을 형성했다. 당시 제천 시내는 미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송학면 도화리까지 침투한 중국군과 신월리에 진지를 구축한 유엔군 사이의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됐다. 재래식 무기로 전세를 뒤집으려던 미군은 대규모 폭격을 퍼부어 중국군을 물러서게 할 수 있었다. 이 저지선은 성공적으로 지켜지게 됐다. 이를 거점으로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반격을 개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제천지역을 중심으로 치열한 공방전이 지속되면서 가장 많은 고충을 겪은 것은 민간인들이었다. 전투 상황에서 희생된 것은 물론이고 반강제 혹은 강제로 협조하였다가 점령군이 바뀌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현지 사정에 어두운 미군 병사들이 혼전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을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을 가한 사건들도 있었다.

 

전쟁은 많은 인명을 희생시키고 많은 가옥과 보잘 것 없었지만 대부분의 산업 시설을 파괴하는 등 수많은 피해를 입혔다.

제천지역에서는 북한군이 점령한 후 각 면에서 학살당한 인사도 수십 명씩에 달했다. 일부는 청주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전쟁 중은 물론 종전 후 월악산·금수산 등지의 빨치산 토벌 과정에서도 많은 인명이 살상됐다. 제천지역은 6·25한국전쟁을 치르면서 1천624명의 주민이 사망하고 517명이 행방불명됐다. 4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3명이 납치됐다. 가옥은 7천979채가 파괴됐다. 시내는 완전히 황폐화됐다. 공산군 토벌 과정에서는 237명을 사살하고 705명을 포로로 잡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