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천시 ' #의당학연구소(소장 양승운(의병연구가, 제천문화원 이사, 제천 병산영당 학술위원장))'가 올해 4월 28일, 제천에서 <의병활동>을 한 ' #류원필(柳遠必. 류해범 전 제천세명고등학교장의 종증조부) 선생 #묘소'를 123년 만에 <발굴>했다.
의당학연구소에 따르면, 류원필 선생은 1851년 '제천 청풍 후산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이(聖邇), '호'는 일재(一齋), '본관'은 진주이며,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 1834~1910년)'의 '문인'으로, 검소하고, 절약하는 성품에 '예'를 좋아했으며, 일 처리에 있어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했다.
박세화 선생이 제천에서 강학해 < #의당학파>가 안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특히, 1891년 청풍 후산동에서 의당 선생이 개최한 < #향음주례>에 '주당(主黨. 집행위원장)'으로 헌신했다.
1896년 < #제천의병>의 < #충주성전투>에 스승의 명으로 ' #윤응선, #곽명근'과 함께 참여했으며, 1899년 <운명>했다.
제천의병 류원필 선생 묘소는 '제천시 금성면 구룡리'에 있다.
류원필 선생의 <문집>으로 < #일재유고(一齋遺稿)>가 있다.
양승운 소장본 일재유고는 책 크기 19.1x28.0㎝, ' #목활자본' 1책으로, '의당학파 초기 형성과정, 교유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며, 1903년 <간행>됐다.
양승운 소장은 “선생의 묘소를 오랜 시간 찾았는데 찾지 못하다가, 우연히 류해범 선생으로부터 '종증조부가 된다'고 하는 말을 듣고 찾게 됐다”고 밝혔다.
류원필 선생 묘소 발굴 관련 기타 궁금한 내용은 의당학연구소(소장 양승운 010-5017-4111)로 문의하면 된다.
* 한편,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 1834~1910년) 선생은 '제천 월악산 용하동'에서 < #용하영당(후칭 #병산영당)>을 <창건>하고, 제천에서 수없이 많은 문인들을 지도하였으며, 1905년 < #춘추대의> 정신으로 월악산 용하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로 인해 제자들과 함께 8개월간 < #조선헌병사령부>에 연행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10년 < #경술국치>를 당하자, “글 읽은 선비로 책임을 통감한다”며, 23일간의 <절식(絶食)> 끝에 < #순국(殉國)>하신 선비정신의 표상이시고, <한말 #대유학자>이다.
또한, 단식 중지를 종용코자 찾아 온 '일제 헌병'의 말장화를 곰방대로 내리치며, "당장 물러가라"고 호통친 일화는 지금까지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의당 선생의 순국은 봉건적인 충(忠)을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글을 아는 자’, 즉 ‘선비로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절명시는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는 장엄한 선택으로, 육신의 사라짐으로 인해 선생의 글씨와 시는 더욱 아름다워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향기를 낸다.
이 유묵은 의당 선생의 몸에서 완전히 녹아서 흘러나온 <육필>이다. 죽음을 앞둔 선비가 모든 것을 비우고 써내려간 글씨야말로, 박세화 선생의 사상과 철학을 다시금 알 수 있는 즉, <불교>로 말해 < #사리(舍利)>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의당 선생의 유묵은 죽음으로 완성된 글씨이기에 더욱 애절하고 아름다우며, 그의 순국이 시(詩) [ #절명시]를 빛나게 하고, 또 글씨가 다시 그의 이름을 빛나게 한다.
절명시는 한지에 먹으로 쓰여졌으며, 크기는 85×30㎝이다.
<절명시(絶命詩)-의당(毅堂) 박세화 선생>
白頭山色映蒼空 백두산색이 푸른 하늘에 비치니
華夏一區箕子東 중화의 한 구역 기자의 동쪽이구나
齊月光風何處在 밝은 달 맑은 바람 그 어디에 있는가
沒人氛祲太濛濛 사람을 죽이는 나쁜 기운이 너무 심하구나.
道亡吾奈何 도가 망했는데 내 어찌해야 하는가
仰天一慟哭 하늘을 우러러 보고 한바탕 크게 통곡하노라
自靖獻聖賢 자정하여 성현께 내 몸을 바치니
嗚呼君莫惑 오호라! 그대들은 미혹되지 말지어다.
*경술 8월 8일 의당노인 절필-역해:정경훈(원광대 교수)
이 절명시를 역해한 '원광대 정경훈 교수'는 “한말 망국의 현실에서 많은 유교 지식인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현실을 애탄(哀歎)했지만, <순도(殉道)>로 자신의 신념을 표출한 분들은 극히 적었다. 의당 선생은 순정한 성리학자였고, 순도를 자신의 마지막 임무로 여겼으며, 순도의 순간을 2편의 절명시로 표현하였다. 의당 선생의 절명시는 '매천 황현(1855~1910)'의 절명시보다 더욱 애처로운 현실을 표현한, 진정한 유교지식인의 한 면모를 드러낸다”고 평가했다.